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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허위선생 순국 112주기 추모제 봉행

편집국장 0 126

왕산 허위선생 순국 112주기 추모제 봉행

구미시(시장 장세용)는 왕산 허위선생 순국 112주기를 맞아 10. 21(수) 11:00 (사)왕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왕산허위선생기념관 내 경인사에서 추모제(향사)를 봉행하였다.


추모제(향사)는 코로나19로 간소하게 진행되었으며 장세용 구미시장이 초헌관, 김재상 구미시의회 의장이 아헌관, 박은호 (사)왕산기념사업회이사장이 종헌관으로 참여하였고, 왕산선생의 유족, 시ㆍ도의원 등 30여명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왕산 허위선생(1855~1908)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자 대한제국 시기 평리원 수반판사, 재판장(오늘날 대법원장), 비서원 승(대통령비서실장) 등의 관직에 재직하였다. 선생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국 의병장과 연합한 13도 창의군을 결성, 의병총대장으로 서울로 진격하였으나 실패,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제1호 사형수로 순국하였다.


서울시는 이를 기려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주요 도로를 “왕산로”라 명명하였으며, 1962년 대한민국은 왕산허위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제1호)을 추서하였다.


왕산선생의 일가도 왕산허위선생뿐만 아니라 수많은 항일 운동가를 배출하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날 추모제(향사)에 초헌관을 맡은 장세용 구미시장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왕산 허위선생의 숭고한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을 실천하신, 왕산선생뿐만 아니라 왕산가의 모든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고 하였다.


■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한 왕산가(家)


독립운동에 투신한 위대한 형제들

왕산 허위 선생의 큰형(허훈 선생)은 진보에서 일으킨 의병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허겸 선생)은 왕산 선생의 김산(김천) 의병과 방산 선생의 진보 의병 때 참여한 것을 비롯해, 신민회 회원으로 신흥무관학교 전신인 신흥학교 설립,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왕산 선생의 순국 이후 일가는 일제의 감시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구미 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허겸 선생은 유족과 사촌 형제인 허형, 허필 선생 등의 일가를 데리고 만주(서간도)로 이주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이회영, 이시영 선생 등의 신민회가 추진 중이던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합류했다.

왕산일가 독립운동 대를 이어가다

왕산 선생의 장남(허학 선생)은 21세의 나이로 경기도 연천에서 왕산 선생이 일으킨 의병에 참여했다. 1913년 독립의군부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으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둘째 아들(허영 선생)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광복군으로 활약했고, 셋째 아들 (허준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총무와 경리부장을 맡았다. 허준 선생은 한때 김좌진 장군 집에서 함께 거주하며 청산리전투에서도 활약했다. 넷째 아들 (허국 선생)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왕산 선생의 사촌형제인 허형 선생은 1906년 오적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아들인 허발 선생은 이상룡 선생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일창한 약방을 경영하며 독립운동 연락처로 사용하는 등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했다. 허형 선생의 외손자인 시인 이육사 선생도 외조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짐작된다. 허형 선생의 동생인 허필 선생의 아들은 허형식 장군으로, 북만주 일대에서 동북항일연군으로 활동하며‘만주 최후의 파르티잔’으로 불렸다.

왕산일가 독립은 험난하고 처절했다

일본군은 청산리전투에서 참패하자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켜 우리 독립운동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무참한 학살을 일으켰고 왕산 일가도 일본군이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서간도를 떠나 북간도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않자 허학 선생과 허국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1937년에는 소련 스탈린의 중앙아시아 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하여 험난한 세월을 보냈다.

이렇듯 왕산 일가는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위협받았고, 세계사의 정치적 격동으로 여러 나라로 흩어져 처절한 삶을 이어갔다. 2009년 구미시 임은동에 세워진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 개관식에서 이들 일족은 생전 처음 사촌 형제 등을 만났다. 100년 만의 만남이었다.

고난을 짐작했음에도 나라를 위한 고귀한 희생‘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 지위가 높고 명예가 있는 이들에게는 가진 만큼 기대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이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한다. 그것이 요구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지위와 명예가 결코 그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진 사회의 유기적인 관계가 작용한 까닭도 있기 때문이다. 왕산 선생 일가야말로 이를 누대에 걸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 했다 말할 수 있다.


왕산 선생이 그 길을 가면서도 일족이 이런 험난한 세월에 처해질 것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한둘도 아닌 집안 전체가 왕산 선생과 뜻을 같이한 고귀한 기개에, 기꺼이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숭고한 생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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